시편 10편: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기도

해설:

이 시편에는 표제가 붙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이 9편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9편과 10편을 합치면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를 따라 지은 ‘이합체’ 시편이 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시인은 자신의 고난을 두고 기도 했는데, 이 시편에서는 악한 자가 번성하고 의로운 사람이 고난 당하는 사회적 상황을 두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시인은 탄원시편에서 자주 사용되는 질문으로 기도를 시작합니다. “주님,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그리도 멀리 계십니까? 어찌하여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에 숨어 계십니까?”(1절) 고난은 깊고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원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그분이 멀리 계신 것 같고 숨어 계신 것처럼 느낍니다. 시인은 자신을 괴롭게 하는 사람을 “악인”(2절)이라고 부릅니다. 시편에서 죄인 혹은 악인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의 욕망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시인은 그들이 스스로 쳐 놓은 올가미에 걸려 들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 다음 시인은 악인의 상황에 대해 길게 묘사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탐욕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을 모독하고 멸시합니다(3-4절). 그런데도 그들이 하는 일은 언제나 잘 되고 선하고 의롭게 살려는 사람을 비웃습니다(5-6절). 그로 인해 그들의 악은 점점 더 심해지고 그들의 본성은 더욱 부패합니다. 그들의 악은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무기가 됩니다(7-11절). 그들은 자신들의 소행이 당장 징벌을 받아 마땅한 것임에도 하늘로부터 아무런 징벌도 내리지 않는 것을 보고 더욱 거만해져서 하나님을 모독합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며 거룩하게 살려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모욕합니다. 시인은 악인들이 하나님을 향해 가지는 모욕적인 말과 생각을 세 번이나 인용합니다(4절, 6절, 11절).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믿음을 지키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모욕과 조롱을 견디는 것도 어렵지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흔들립니다. 

이렇게 악인의 불신과 악행과 신성 모독을 고발한 다음 시인은 하나님을 향해 간구합니다. “주님, 일어나십시오”(12절)라는 기도 역시 탄원시편에 자주 나오는 기도입니다. 침묵을 깨뜨리고 떨치고 일어나 악인을 벌하고 고통받은 사람들을 구해 달라는 호소입니다. 이 지점에서 시인은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악인에 의해 고통받는 모든 ‘아나빔’(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드립니다. 악한 자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침없이 악행을 일삼지 않도록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실하게 사는 사람들이 겪는 고난이 지속되지 않도록 공의의 손을 펼쳐 달라고 기도합니다(12-15절). 

시인은 호소와 탄원으로 시작한 기도를 찬양과 고백으로 마칩니다. 진실한 기도는 모두 고백과 감사와 찬양으로 끝나야 합니다. 진실한 기도는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게 하고 잊고 있던 하나님의 위엄과 성품을 다시 기억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주님은 영원무궁토록 왕이십니다. 이방 나라들은 주님의 땅에서 사라질 것입니다”(16절)라고 선언 합니다. 악인들이 득세하는 현실로 인해 잠시 약해졌던 믿음을 회복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주님께 대한 신뢰의 고백을 더합니다. 주님께서는 불쌍한 사람, 가난한 사람, 외로운 사람, 힘 없는 사람의 사정을 살피시고 변호 하시며 도와 주시는 분임을 확인하고 고백합니다(17-18절). 

18절의 “억압하는 자”는 히브리어 ‘에노쉬 민 하아레쯔’의 번역인데, 개역개정의 “세상에 속한 자”라는 번역이 더 좋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의 욕망대로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세상을 전부로 알고 있으며, 세상과 함께 멸망될 존재들입니다. 반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롭게 사는 사람들은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묵상:

악인에 대한 시인의 묘사를 읽으면서 3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성은 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합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사모하고 신뢰하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려는 사람은 소수이고, 절대 다수는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들에게도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있습니다. 악을 행할 때마다 “혹시나?” 하면서 하나님의 징벌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을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의 악행은 점점 더 심해지고 하나님께 대한 불신과 오만은 더욱 강고해집니다. 인간 세상에는 죄악이 더 편만해지고 깊어집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고 신실하고 거룩하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은 자주 고난 당하고 무시 당하고 밀려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정직하고 진실하고 거룩하게 사는 사람이 잘 되고 악하게 사는 사람들이 안 되는 것이 맞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믿는 사람들조차 때로 믿음이 흔들립니다.

그럴 때가 기도할 때입니다. 불신을 조장하는 현실에 잠시 눈 감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들어 올려야 합니다. 그러면 약해졌던 믿음이 회복됩니다. 가려졌던 영적 시야가 밝아집니다. 악인들의 번영과 신실한 이들의 고난을 보고 조급해졌던 마음에 평강이 들어찹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 잡아 주실 것에 대한 믿음이 회복됩니다. 그 믿음으로 악인들의 번영을 부러워하지 않고 묵묵히 믿음의 길을 걸어갑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부정한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과 물질이 전부로 보이기 때문에 좀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누리기 위해 악을 일삼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물질과 함께 영원히 사라져 버립니다. 반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늘이 보입니다. 물질이 전부가 아님을 압니다. 그래서 현세에서 손해를 보고 고난을 당해도 하나님을 믿고 의롭게 살기를 힘씁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하늘에 속한 사람들”(고전 15:48)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의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지금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골 3:1)합니다. 시인이 여기서 묘사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에나 온전하게 바로잡힐 것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들” 답게 선하고 의롭게 살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3 thoughts on “시편 10편: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기도

  1. 세상 사람들이 조롱하고 멸시 하더라도 영의 눈과 귀가 밝아저. 주님의 영광을 보고 주님의
    말씀듣고 순종 하기를 원합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함께하시는 주님을 체험하며 기쁘고
    즐겁게 살기를 원합니다. 이웃과 함께 오시는 구세주를 진심으로 환영하는 주간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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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Kentucky Mayfield 지역은 토네이도로 말미암아 아비규환되고 사망자가 100명에 이를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의 욕망이 주님이 지으신 자연환경을 파괴함으로 스스로 재앙을 불러오며 아직도 지구 온난화가 가짜라고 주장하는 불쌍한 인간들이 넘치고있습니다, 당대의 헛된 욕망에서 벗어나 주님이 지으신 평화와 공의에 참여해 앞으로 오는 다음세대 또 그 다음세대에도 환경이 잘 보전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순리에 적응하면서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며 감사의 나날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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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지금 이 시대 시인이 지은 시라고 해도 될만큼 현실적입니다. 히브리 문화권의 시면서 현대 서구사회의 모습을 그린 시처럼 읽히기도 하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나라 사람들이 겪는 고통의 시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녕 연약한 자의 고통에 관심이 없으신걸까요? 불의를 저질러 축재하고 자손 대대로 제 마음껏 누리고 사는 인간들을 그냥 두시는걸까요? 세상의 혼탁한 물결 속에서 나를 지키며 사는 길은 내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입니다. 내가 가진 것, 내가 원하는 것만 생각합니다. 가지고 있는 것은 주께서 주신 것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처럼 보이는 것마저도 주께서 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찾아가실 수도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바래도 되는지, 주께서 좋아하시는 것인지 끊임없이 마음으로 저울질을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대하며 사는 한편 ‘세상에 속한 자’로 살아가는 현실도 무시할 수 없기에 종종 남이 가진 것, 남이 원하는 것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남들처럼…”이라는 생각만큼 무거운 생각이 또 있을까요. 남의 눈, 남의 기준처럼 벗어나기 어려운 숙제도 없습니다. 이럴 때 예수님의 자유를 떠올립니다. 당신 멍에는 쉽고 당신의 짐은 가볍다는 말씀을 생각합니다. 내게 이미 주신 것, 필요한 것을 주신다고 하신 약속만 생각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으로 충분하다는 믿음과 지혜가 어지러운 세상살이에서 나를 지켜줄 것입니다. 악인의 무탈을 샘내지 않게 하소서. 불의한 자의 안녕을 부러워하지 않게 하소서. 내게는 내 몫으로 주신 세상이 모르는, 그들은 결코 알 수 없는 기쁨과 평강이 있음을 기억하게 하소서.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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