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편: 공정하신 재판장

해설:

앞에 나온 시편들은 곤경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하는 기도였습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후에 드릴만한 감사와 찬양의 기도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놀라운 행적”(1절)으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주님의 이름을 노래”(2절)합니다. “공정하신 재판장”(4절)이신 주님께서 “공정하고 정직한 판결”(4절)을 내리셔서 원수들로부터 자신을 구해 주셨기 때문입니다(3절). 주님께서는 악을 행하는 원수들과 이방 나라들을 심판하시고 멸망시키셨습니다(5-6절). 

이런 경험에 기초하여 다윗은 하나님의 의를 고백하고 찬양합니다. 주님은 영원한 왕이시며(7절) “정의”와 “공의”(8절)로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억울한 사람들이 의지할 피난처입니다(9절). 주님께서는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10절). 

이어서 다윗은 사람들을 향하여 말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이 하신 일을 전파하라고 권합니다(11절). 하나님께서는 고난 받는 사람과 가난한 사람의 “부르짖음을 모르는 체하지 않으시기”(12절) 때문입니다.  

다윗은 다시 자신의 형편으로 눈을 돌려 하나님께 기도 드립니다. 그는 “죽음의 문에서”(13절)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도 “미워하는 자들”(13절)에게서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한 번 더 손을 뻗어 구원해 주시면 그 은혜를 찬양하고 전파하겠다고 말합니다(14절).

이렇게 다시금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눈을 돌리니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원수들의 미래가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결국 당신의 정의와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가 판 함정에 스스로 빠지게”(15절) 하시고, “자기가 몰래 쳐 놓은 덫에 자기 발이 먼저 걸리게”(15절) 만드십니다. 그런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이 드러납니다(16절).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악인들과 이방 나라들이 갈 곳은 “스올”(17절) 뿐입니다. 히브리어 “스올”은 깊은 웅덩이 혹은 무덤을 의미합니다. 

반면, “가난한 사람이 끝까지 잊혀지는 일은 없으며, 억눌린 자의 꿈도 결코 헛되지 않을”(18절)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시편에서 “가난한 자”(히브리어로 ‘아나비’)는 거룩하고 의롭게 사는 사람과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는 잊혀질 수 있어도 하나님께는 끝내 잊혀지지 않습니다. 또한 그가 소망하는 일도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자막으로 다윗은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합니다. 악한 사람들과 이방 나라들이 하나님을 향해 맞서지 않도록 심판하시기를 구합니다(19절). 그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두려움에 떨게 하시며”(20절) “자신들이 한낱 사람에 지나지 않음으로 스스로 알게”(20절) 해 달라고 구합니다. “사람”(개역개정은 “인생”)은 히브리어 ‘에노쉬’의 번역으로서 깨어지기 쉬운 한계적 존재를 가리킵니다. 믿음의 핵심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묵상:

인생은 관계입니다. 관계를 통해 인생은 주어지고, 관계 안에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인생을 복되게 하는 것도 관계가 결정하고,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것도 관계가 결정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모두 죄성에 깊이 물들어 있습니다. 죄성으로 인해 우리는 관계 안에서 서로 상처를 주고 받습니다. 때로 잘못된 만남으로 인해 지옥같은 나날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그 문제를 해결 받으면 마치 천국을 얻은 것 같은 기쁨을 경험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혹은 다른 상황에서 우리는 이런 문제를 자주 겪고 살아갑니다. 

그렇게 관계가 어그러져 고통을 겪을 때면 먼저 나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면 어느 정도의 책임은 나에게도 있습니다. 다윗이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심판과 징계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 후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가 신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편을 읽으면서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기 이전에 나 자신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윗이 고백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정의와 공의로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분이기에 그분 앞에 먼저 나 자신을 세워 심판 받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 그분의 처분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그럴 때 “공정하신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관계를 바로 잡아 주십니다. 주님께서 관계를 해결해 주실 때에만 우리는 9편에서 다윗이 고백한 것과 같은 감사와 찬양의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에 근거하여 이웃에게 “내가 경험한 하나님”에 대해 증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론 속에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현실 안에서 일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5 thoughts on “시편 9편: 공정하신 재판장

  1. 우리들은 직장과 사회와 가정에서 얼키고 설킨 관계에서 서로 받고 주는 언행을 통하여 관계의 설정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 관계속에서 주고 받는 상처를 만나면 우선 타인의 잘못이 먼져 눈에 들어오며 나의 잣대를 통해 대상을 바라보며 비난의 감정이 먼저 떠오르는 것을 경험하며 살고있습니다, 바퀴가 삐걱거릴 때 우선 내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에 벗어나지 않았나 살펴보고 주님의 옳은 심판을 위해 기도하게 하시옵서소.
    어제 실수없이 시술을 잘 하도록 지켜 주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따르는 후유증이 없이 깨끗하게 치유되기를 기도합니다.
    감사에 감사를 더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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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먼저 공정하시고 정의의 재판관,하나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또한 사랑 이시고 구원의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날 만난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했습니다만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고 치유받는 모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지금부터라도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원합니다. 이웃과 더불어 말씀으로 매일아침 무장해 망가진 세상에
    구원의 은혜를 삶으로 전하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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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이 믿음의 핵심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 합니다. 다윗은 그 믿음의 관계에 있었고,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 믿음의 관계를 통해서 더 깊은 하나님을 알아가고 자신에 대해서도 알아갔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믿음의 눈으로 그 상황을 바라본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다른 것들을 배제 한 후,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관계가 어떠한지 점검하며, 기대하고, 기다리고, 기도하는 것 같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과 믿음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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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주님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나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자들을 기억 해봅니다. 말씀의 거울 앞에 서서 나를 보니 상대 방도 문제지만 주님을 믿는 나로서 내가 원인이 된 것 같습니다. 공정하신 주님의 판정에 굴복하고 오늘도 불꽃 같은 눈으로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을 잊지 않는 하루가 되게 해주시기를 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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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약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은 자기의 힘으로 그 상황을 벗어 나기가 어렵습니다. 누가 일으켜 주어야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평안하게 걸어가고 있어도 넘어져 쓰러진 사람, 힘없이 길 한 편에 쳐져 있는 사람을 보면 일으켜 주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시편에 나오는 악인들은 구덩이를 파고 그물을 숨겨놓은 (15절) 사람들입니다. 타인을 도와 주기는커녕 잘 못되라고, 나쁘게 되라고 덫과 함정을 숨겨 놓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없는데 성경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진 표현 중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가 있습니다. 이솝의 우화에서 나왔다는 말도 있고, 고대 그리스의 드라마라는 설도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이 표현이 그다지 성경적이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어디선가 도움이 올 것이라고 기대하며 무기력하게 사는 것을 경계하라는 뜻에서 사용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내가 뭔가를 열심히 하기 때문에 상처럼 받게 되는 것이 아님을 경험해 본 사람은 이 표현을 남용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약자는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세계 정세나 사회 현상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민족주의적인 정서와 피아를 구분하는 대립각의 사고가 점점 깊어지고 있다는 우려를 표시합니다. 관계 속에서 살아가도록 지음을 받은 사람이 살아 남는 길은 서로를 인정하고 품어 주는 데 있습니다. 악인의 길은 디자인 자체에 결함이 있는, 망할 수 밖에 없이 설계된 생각입니다.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길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약한 사람을 보면 돕고 싶도록 빚어진 존재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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