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애가 2장: 발칙한 기도

해설:

이 시편은 성경 안에 있는 모든 시편들 중 가장 강력한 언어로 하나님의 심판 행위에 대해 비판합니다. 유다를 멸망시킨 것은 느부갓네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악행을 그대로 두고 보셨기 때문에 그런 재앙이 닥쳤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 모든 재앙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에게 돌립니다(1-10절). 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4절, 5절) 작심하고 이스라엘과 유다를 멸망 시키셨다고 말합니다. 그분의 이름을 두신 성전도, 그곳에서 그분을 위해 섬긴 제사장들도 모두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진노하게 한 것은 인정하지만, 이토록 잔인하게 짓밟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11절부터 시인은 1인칭으로 화법을 바꿉니다. 그 자신이 ‘처녀 시온’이 되어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고통을 묘사합니다. 이로써 유다 백성이 겪는 고통은 더욱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여기서 시인은 유아와 아이들이 겪는 고통에 집중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무고한 사람들에게까지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함입니다. 이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통곡의 눈물을 쏟아 놓음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큰 고통을 주었는지를 하나님께 알리는 것 뿐입니다. 그분의 심판은 정당한 것이었지만, 그로 인해 그들이 겪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아시면 혹시 마음을 돌이키실 수도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묵상:

우리는 시편에서 가끔 ‘저주 시편’을 만납니다. 시편 109편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원수에게 앙갚음을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기도 중에 사용된 언어와 표현들이 충격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런 기도를 드려도 되나?’라는 의문을 가지게 합니다. 저주 시편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들)에게 악담을 퍼붓는 것이라면, 예레미야 애가 2장은 하나님에게 악담을 퍼붓는 기도입니다. 저주 시편보다 한 술 더 뜬 것입니다. 유다 백성이 당한 모든 재앙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을 묻습니다. 자신들이 벌 받을 죄를 저지른 것은 맞지만, 해도해도 너무 하신 것이라고 고발합니다. 아무리 진노하셨다고 해도 앞뒤 분간 못하는 유아들까지 고통을 당하게 해야 했느냐고 따집니다. 참으로 발칙한 기도입니다.

시편에 저주 시편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도, 하나님을 향한 이런 발칙한 기도가 애가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고 보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도 때로 그런 상황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당한 것이 너무도 억울하고 분한데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 억울한 마음을 쏟아 놓습니다. 때로는 어떤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너무 하신다’ 혹은 하나님께 버림 받았다는 느낌에 빠집니다. 그럴 때 하나님에게 나아가 있는 그대로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쏟아 놓습니다. 그럴 때, 그 분노와 서운함의 감정을 해소하고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항상 ‘바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죽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언제나 진실하게, 정직하게 서야 합니다. 분노와 서운함이 있다면, 그대로 그분 앞에 쏟아 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받아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4 thoughts on “예레미야 애가 2장: 발칙한 기도

  1. 하나님께서 누누히 경고했지만 끝까지 우상 웅배와 자기 만족에 몰두되어 진노를 받으면서 그 진노의 대가가 비 대칭적이라고 불평하는 예레미야의 독백을 통해 우리의 감성을 이해할수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나갈 때는 우리가 잘나서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지만 어려움을 당할 때는 주위한경을 탓하는 자기변명으로 정당화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주님 앞에 옳게 사는 것 보다는 진실되고 성실하게 나아가는 믿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앞에 모든것을 턿어놓고 지유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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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주님께서 모든것을 공평하게 심판 하는것을 믿습니다. 심지어는 성전과 성막과 제단과 성소
    까지도 역겨워하시는 주님이 제 머리로서는 이해가 되지않지만, 구원과 사랑의 주님의 심판을
    감수 하기를 기도합니다.성전인 몸과 제단인 가정과 성소인 교회를 다시 성찰하는 믿음을 원
    합니다. 주님 말씀을 감사하며 주님 닮아가기를 원하는 몸과 마음과 말씀에 순종하는 혼이
    필요합니다. 대강절에, 첯째로 말씀으로, 둘째로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며 셋째로 삶으로 말씀
    순종하는 성도들과 가정과 교회가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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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하나님 앞에서는 항상 진실되기를 소망합니다. 정말 친한 관계는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솔직하게 자신의 모든 감정들을 서로 이야기 합니다. 저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런 친밀한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실되며 정직하게 나누는 그런 친밀한 관계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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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오늘 목사님이 쓰신 해설은 마치 나를 위해 쓰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버지니아에서 캘리포니아로 다시 돌아오고 나서 일 년 뒤에 사업체 관련 사기를 당했습니다. 피해액이 컸습니다. 이미 잃어버린 돈의 액수보다 앞으로 “밑 빠진 독에 물 붓듯이” 들어가야 할 리스 계약의 렌트비가 배 이상으로 컸습니다. 사기꾼들을 잡아 넣으려고 만나본 변호사가 열 명이었습니다. 사기사건은 증명하기가 어렵다는 말들을 했습니다. 소송으로 간다고 해도 리스 계약 상의 렌트비는 여전히 우리 책임이고, 소송 자체에 드는 시간과 비용은 예상 만으로도 엄청 났습니다. 여기까지 쓰는데 또 그 때의 공포가 되살아납니다. 큰 애는 대학교 2학년, 작은 애는 사립고등학교 10학년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항상 “바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해설 말씀의 뜻을 잘 알 것 같습니다. 저와 남편은 ‘사람 앞에서’ 늘 백 퍼센트 바른 생활하는 사람으로 살고 그렇게 보이려고 애쓰며 살아 왔는데 이렇게 큰 흠집이 났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는 억울함이, 사람들에게는 수치심이 가득했습니다. 나보다 훨씬 더 예민하고 생각이 깊은 남편을 잠 못자며 괴로와하게 만든 것 이 수치심이었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의 위로가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셨습니다. 바른 생활보다 정직한 영을 원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느끼는 실패의 수치심은 상처와 흠집을 안고 사는 이웃의 고통을 알아보는 눈이 되었고, 억울함으로 쓰린 마음은 연민과 연대감으로 바뀌었습니다. 주님은 내가 바르기 때문에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바르기는 커녕 삐뚤기만한데도 사랑하시고 고쳐주십니다. 고통의 시간이 있었기에 주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고통의 시간 덕분에 주님과 나의 간격이 줄어 들었습니다. 질기기만 한 팬더믹의 시간도 우리에게 유익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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