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22장: 하나님을 안다는 것

해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유다 왕실에 말씀을 전하십니다. 왕실이 힘쓸 일은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고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일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다윗 왕실은 든든히 서 있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왕궁은 폐허가 될 것입니다(1-5절). 불행하게도, 유다 왕실은 하나님에게 등 졌고 공평과 정의를 외면했습니다. 그로 인해 유다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6-7절). 그 때가 되면 많은 민족이 폐허가 된 유다와 예루살렘을 보고 불쌍히 여기게 될 것입니다(8-9절).

이어지는 말씀은 요시야 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살룸(여호아하스)에 대한 예언입니다(10-12절). 그는 왕위에 오른지 3개월 만에 이집트로 끌려갑니다(왕하 23:31-33). 주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그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이집트 왕은 살룸 대신에 요시아의 아들 엘리야김을 왕으로 삼고 그의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꿉니다(왕하 23:34). 그는 예루살렘에서 11년 동안 다스렸는데, 그는 유다의 운명에 아랑곳 하지 않고 궁궐을 확장하는 일에 국력을 허비합니다. 그로 인해 공평과 정의는 유다 땅에서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회 정의가 무너지면 빈익빈부익부의 현상이 더 심화되고 사회적 약자들은 고통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13-17절). 주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여호야김의 비참한 종말을 예언하십니다. 그가 죽을 때 유다 백성은 그를 두고 애도하지도 않을 것입니다(18-19절). 그 예언대로 주님께서는 바빌로니아 군대를 통해 유다를 심판하십니다. 그 심판이 임할 때 유다 백성은 해산하는 여인이 진통하는 것처럼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20-23절).

이어지는 예언은 여호야김 왕의 아들 고니야(여호야긴)에 관한 것입니다(24-30절). 그는 3개월 동안 왕위에 있었는데, 그 짧은 기간 동안 그도 역시 악한 일만 행합니다(왕하 24:8-9). 그가 통치하는 기간 동안에 유다는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으로부터 세 번째 공격을 받습니다. 그로 인해 예루살렘의 궁궐과 성전은 약탈 당하고 많은 사람들이 바빌로니아로 잡혀 갑니다(왕하 24:10-17). 고니야는 바빌론으로 잡혀가 그곳에서 생을 마칩니다.

묵상:

주님께서는 여호야김에게 아버지 요시야 왕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요시야 왕은 법과 정의를 실천했습니다(15절). 그는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의 사정”을 헤아리고 살폈습니다”(16절).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진실되게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섬기는 사람이라면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긍휼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힘으로 공평과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힘씁니다. 요시야 왕이 그랬습니다. 거기까지 가야만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여호야김 왕에게 “바로 이것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니겠느냐?”(16절)고 물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에 대해 그토록 경고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상숭배는 필경 개인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물질주의적으로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우상숭배의 동기 자체가 이기적인 욕망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의 종교에서 공평과 정의를 말하는 법은 없습니다. 어떻게든 요행수를 찾아 나 혼자 잘 되기를 힘쓰는 것이 우상숭배의 속성입니다. 반면, 하나님 신앙은 공평과 정의가 이 세상에 자리잡게 하는 노력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고 모두가 복되게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관심사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을 아는 사람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질문을 바꾸어 봅니다. ‘나는 공평과 정의가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일을 힘쓰고 있는가? 사회적 약자들을 살피고 돌보고 있는가? 나의 매일의 관심사에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는가?’ 

4 thoughts on “예레미야서 22장: 하나님을 안다는 것

  1.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앞에 있는데도 끝내 회개하지 못하고 우상숭배로 자기 중심적인 유다왕들과 지도자들의 교만함을 벌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우리도 이조말렵 중심을 잃고 청나라에 기댔다 러시아에 의지했다 끝내는 일본에 왕실을 내어준 비극을 되새겨 봅니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일수록 진실되이 주님앞에 나아가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지혜가 지도자들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공의와 정의가 가려지는 일이 없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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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우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가정과 교회와 국가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말씀을 존중
    하고 순종 하기를 원합니다. 이웃과 함께 사랑으로 소외된자를 찾아가 진정한 위로를 주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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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엄마가 자주 하던 말 중에 “사람은 아래를 보고 살아야지 위를 보고 살면 안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보다 못 사는 사람을 보고 잘 사는 사람을 보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만족하며 살라는 뜻이었습니다. 토를 달아도 여러 가지로 달 수 있는 말이었는데 그런 말을 하는 상황과 속뜻을 알았기에 따진다거나 반대의 예를 든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오늘 해설에서 우상의 종교와 하나님 신앙을 대조할 때 문득 엄마의 이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우상을 예배하는 것은 자신의 위치를 높이려는 데 골몰하기 때문입니다. 위로만 올라가려는 마음 때문에 ‘용하다는 것은 다’ 찾게 됩니다. 욕망은 위를 볼 때 일어납니다. 나보다 잘 사는 사람을 볼 때 생깁니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필통인데 오늘 어떤 애가 가져온 일제 이층 필통을 보고 나니 내꺼는 너무나 밉고 촌스러워 신경질까지 납니다. 선명한 기억이고 감정입니다. 아래를 보고 살라는 엄마는 인정이 많았습니다.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 줄 땐 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빌려줬습니다. 갚으면 좋고 못 갚아도 그냥 넘어간다는 심정으로 빌려 주었습니다. “지는 게 이기는거”라는 말도 엄청 자주 들었습니다. 남과 싸울 줄 모르는 사람이니 그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을 것입니다. 공평과 정의를 이루며 살겠다는 각오는 없었어도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서도 자기 종교는 기독교, 하나님 잘 믿고 살면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말하던 엄마가 그리운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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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하나님을 지식이나 정보로 아는 사람인지, 혹은 하나님을 경험하며 아는 삶, 즉 하나님의 나라를 내 삶속에서 드러내고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하루, 내 평생에 ‘하나님을 아는 사람’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과연 나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인가?” 라는 질문이 제 마음의 등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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