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11장: 고향 사람들로부터의 살해 위협

해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모세를 통해 주신 언약을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기억하게 하라고 예레미야에게 명하십니다. 그 언약에 의하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얻고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1-5절).   유다 백성은 순종이 아니라 반역을 택합니다. 주님께서는 약속대로 그들의 악행을 심판하실 것입니다(6-8절). 그들은 조상들의 죄악으로 돌아가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때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찾겠지만, 아무런 도움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9-13절).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그 백성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14절). 한 때 유다는 주님으로부터 “잎이 무성하고 열매가 많이 달린 올리브 나무”라고 칭찬을 받았으나, 이제는 심판하기로 정하셨기 때문입니다(15-17절).

이 즈음에 예레미야의 고향 아나돗 사람들이 그를 제거할 음모를 꾸밉니다. 아나돗은 아비아달 제사장이 솔로몬에 의해 파면되고 쫓겨 갔던 곳입니다. 그런 역사로 인해 아나돗의 제사장들은 유다 백성으로부터 미움과 차별을 받아 왔습니다. 엎친데 덥친 격으로, 유다 백성은 예레미야에 대한 원한을 아나돗 사람들에게 퍼부었습니다. 그래서 아나돗의 제사장들은 예레미야에게 예언을 하지 말라고 요구합니다. 그가 듣지 않자 그들은 예레미야를 제거할 음모를 꾸민 것입니다. 다행히, 그 사실을 예레미야가 미리 알아 차립니다. 예레미야는 주님께서 그 사실을 알게 하셨다고 말합니다(18절).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합니다(19-20절). 주님께서는 아나돗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답하십니다(21-23절).

묵상:

다윗이 죽은 후에 아도니야 왕자가 스스로 왕으로 자처했을 때 대제사장격이었던 아비아달이 그의 편에 섰습니다(왕상 1장). 하지만 예언자 나단의 중재로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고 아도니야는 반역자로 처형을 당합니다. 그 때 솔로몬은 아비아달 제사장이 다윗 왕에게 충성했던 것을 감안하여 목숨을 살려 줍니다. 그 대신 대제사장직에서 파면하고 아나돗으로 귀양을 보냅니다. 그 이후로 아나돗 사람들은 유다 백성으로부터 반역자의 후손으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런 차에 예레미야가 재앙과 심판의 예언을 전하고 다녔으니, 아나돗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아나돗 사람들은 예레미야에게 입을 다물라고 종용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자 그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이 사실을 알고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자신은 하나님에게 부름 받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 양”(19절)처럼 주님의 말씀을 대언했을 뿐인데, 고향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죽음의 위협까지 받았으니, 그 억울함이 심했을 것입니다. 이 때 예레미야가 드린 기도는 다윗의 시편 하나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는 친구들에게 배신 당하여 고통 받는 중에 이렇게 토로 합니다. 

“나를 비난하는 자가 차라리 내 원수였다면, 내가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가 차라리 자기가 나보다 잘났다고 자랑하는 내 원수였다면, 나는 그들을 피하여서 숨기라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나를 비난하는 자가 바로 너라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바로 내 동료, 내 친구, 내 가까운 벗이라니! 우리는 함께 두터운 우정을 나누며, 사람들과 어울려 하나님의 집을 드나들곤 하였다”(시 55장 12-14절). 예레미야가 자신에 대한 살해 음모를 알고 충격을 더 심하게 받은 이유는 자신을 이해하고 지지하고 옹호해 주어야 할 고향 사람들이 자신을 더 증오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런 고백 후에 “나는 오직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니, 주님께서 나를 건져 주실 것이다”(시 55장16절)라고 고백합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람을 믿으면 언제든지 배신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을 대상은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알았고, 예레미야도 고향사람들의 배신을 통해 그 사실을 깨닫습니다. 사람은 단지 사랑의 대상일 뿐입니다. 믿을 수 없도록 연약한 존재임을 알기에 사랑하기를 힘씁니다. 

5 thoughts on “예레미야서 11장: 고향 사람들로부터의 살해 위협

  1. 주님의 약속, 십자가의 은혜를 항상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놀라운 사랑을 감사하며 말씀순종
    하며 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었던 친족과 동료 들로 부터 누명을 쓰고 배반을 당하더라도
    모든 상항을 아시고 공평한 심판자이신 주님을 의지하고 평강을 찾는 삶을 간구합니다.
    비록 위협과 조롱을 당하더라도 이웃과 함께 신실 하신 주님을 세상에 전하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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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우리가 맺으며 사는 여러 관계 속에는 갈등과 긴장이 늘 들어 있습니다. 가까운 관계는 친밀한대로 또 가깝기 때문에, 데면데면한 관계도 나름대로 다 부족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이 고정된 한 모습이 아니듯 관계도 늘 움직이고 변합니다. 나이 들면서 관계에 대한 기대가 많이 달라진 것을 깨닫습니다. 예전에는 (‘라떼는 말이야’를 피하려니) 모든 것이 촘촘하고 단단했습니다. 소셜 네트웍의 네트 (net)가 말 그대로 구멍이 아주 작고 촘촘한 그물이었습니다. 여러 조건과 조합으로 만들어진 관계망은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는 데 필요한 안전망 (서커스에서 밑에 쳐 놓은 그물같은)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민자의 삶은 전혀 다른 관계망을 뜻합니다. 가족과 교회가 핵심적인 관계가 됩니다. 이민자로 살고, 또 나이도 드니 관계에 대한 생각이 느슨해진 것을 봅니다. 가족은 친밀성 때문에 ‘상처’를 주고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로를 너무 잘 안다는 착각이 과도한 기대를 갖게 만듭니다. 부부간에도 자녀와도 ‘너는 내 마음을 알지?’ 하는 기대가 서로에게 짐을 지울 때가 많습니다. 교회에서 맺는 관계는 친밀성이 결여된 탓에 갈등이 생깁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쉽게 하는 말, 짐작으로 인해 불필요한 오해를 만듭니다. 곳곳에 구멍이 생기고 느슨해진 그물처럼 마음을 편하게 가져야 할 때와 좀 더 세세하고 살뜰하게 살펴야 할 때를 조절하는 지혜가 모든 관계에 필요합니다. 비록 백 년을 살지는 않았지만 ‘목숨을 걸’ 일인지, 사흘 지나면 기억도 안 날 일인지 구별할 줄 아는 세근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예레미야가 겪는 고초가 사회적 위치나 역량 때문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로부터 받는 공격과 위험입니다. 올해 노벨 평화상은 언론인들로 결정 되었습니다. 사회의 진실을 알리고 어두운 곳을 조명하는 일에 애쓴 공로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진실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언론인들이나 예레미야가 있어 우리의 영혼은 부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자신을 돌아보고 내면을 가꾸는 책임이 있습니다. 진실을 듣고 깨닫는 사람은 진실을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직 주께만 제 사정을 말씀드리는 (20절)” 예레미야의 고독한 책임을 교회가 함께 짊어지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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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무심코 지나친 사람들의 시선조차 마음을 괴롭히고 작은 행동과 말투로 미움이 일어나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자기 편이라 생각한 사람들이 자신을 살해 하려고 한다는 것을 안다면 어떠 했을까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과연 우리라면 두려움과 괴로운 심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앞서 언약 안에 산다는 것에 대비해 보면 더욱더 참담한 심정일 것입니다. 주의 부름을 받고 그의 뜻을 눈물과 슬픔의 계시를 온 인생을 통해 전하고 있는데도 두려움과 괴로움이 더해진 상황인 것입니다. 주를 붙들고 호소하며 주의 손을 의지하기까지 덧없이 흔들리는 자신을 보았을 것입니다.
    언약 안에서, 그 속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인생의 긴 여정 속에 숱한 자신만이 아는 괴로움과 눈물을 쳐다보며 인간적인 생각으로선 알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역행과 같은 그것을 잡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 옛날 믿음의 사람들은 주의 음성을 듣고 끝자락을 보았고, 놀라운 이적들을 체험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 먼 곳도 그리고 여전히 먼 곳도 보이지 않는 것은 똑같습니다. 지금의 세상은 무너질 듯 흔들리고 사람들은 흩어져 자신을 외치고 주의 이름을 욕하며 즐거워 합니다. 진실을 외면하며 왜곡하고 도리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고 싶지 않는 지식과 배를 채우는 곳입니다. 어찌 살아가야 하는지, 그냥 지나가는 시간을 모르는 뿌연 안개 속에 서 있습니다. 그저 인식하고 살아있는 곳이 있다면 그것은 이곳에서 더 큰 세상의 이름, 마음에 이미 오신 주님을 부르고 의지할 뿐입니다. 무엇도 변할 것 같지 않는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다 변해갈 마음의 세상으로의 이해할 수도, 알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을 노래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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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예레미아가 자기 고향에서 미움 받는 것과 대조가 되어 인간 사회의 부조리를 다시한번 생각해 봅니다, 모순 덩어리인 인간 사회에서 자기의 생명을 내 놓고 지속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예레미아 예언자의 고독함을 보게됩니다.
    내 귀와 입이 제 기능을 제대로 할수있게 주님의 은총을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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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예레미야의 심정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임을 다시한번 되새깁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뜻대로 사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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