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기하 4장: 배신의 결말

해설:

아브넬이 죽었다는 소식이 이스보셋에게 전해지자 그는 맥을 잃고 맙니다. 그가 왕위에 앉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아브넬 장군의 위력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보셋을 따르던 이스라엘 백성도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아브넬을 도와 이스보셋을 보좌하던 두 장군 바아나와 레갑은 이스보셋을 암살합니다. 그들은 그의 머리를 잘라 들고 밤새도록 걸어서 헤브론에 있던 다윗을 찾아갑니다. 다윗이 그들을 반기고 큰 상을 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1-8절). 

그들의 예상과 달리 다윗은 그들을 처형하여 그 주검을 헤브론의 연못가에 달아 맵니다. 자신들의 살 길을 찾으려고 주군을 살해한 그들의 배신을 징계한 것입니다. 다윗은 그들이 가져 온 이스보셋의 머리를 아브넬의 무덤에 묻습니다(9-12절).

묵상:

아브넬과 레갑과 바아나는 사울이 죽었을 때 이스보셋을 왕으로 옹립한 주역들입니다. 그들은 이스보셋에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사울의 왕권을 이어가기 위함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위기에 직면하자 아브넬도, 레갑과 바아나도 자신들의 살길을 찾아 변신과 배신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운 것은 그들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이스보셋 편에 서는 것이 불리해지자 기민하게 주군에게 등을 돌리고 배신을 선택합니다. 

그들이 특별히 악한 사람들이었다고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위기에 직면했을 때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게 만드는 이기심이 있습니다. 때로 그 이기심은 아브넬과 레갑과 바아나가 행했던 것처럼 추악한 배신을 행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심하지는 않아도 어떤 선택 앞에서 우리는 “무엇이 옳은 일인가?”를 묻기 보다는 “무엇이 나에게 이로운가?”를 묻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좋아했던 <논어>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이익을 보면 의를 생각하고 위기를 보면 생명을 바친다. 믿음이란 이기심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의를 위해 살아가기 위해 힘쓰는 과정입니다. 

5 thoughts on “사무엘기하 4장: 배신의 결말

  1. 자신의 이익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를 구하는 습관을 원합니다. 어디에 줄을 설가 궁리
    하지말고 비록 손해와 위험이 있더라도 충직한 동역자가 되는 신념이 필요합니다.
    이웃과 더불어 주님만 기리고 말씀에 순종하고 조금이라도 더 주님 닮아가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Like

  2. 다윗에게는 원칙에 충실한 겸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실제로 옳은 것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겸손은 원칙을 인정하고, 자신보다 원칙을 우선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반대에 부딪혀도 원칙을 굳게 지키는 것을 뜻하지요. 다윗, 자신에게는 엄청난 이득이었던 일들 (사울왕을 죽일 수 있었던 일, 그리고 더 이상 국내에서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일) 이 있었어도, 평소에 가지고 있던 원칙에 충실한 겸손을 볼 수 있습니다. 내 삶도 자신의 이익을 위한 삶이, 아닌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사는 원칙과 충실한 겸손을 가지기를 소망합니다.

    Like

  3. 성경에는 “좋은” 사람만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잘 믿은 모범적인 사람의 이야기로 가득한 위인전 같은 책이 아닙니다. 다윗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목을 베어 온 두 장교를 그냥 둘 리가 없습니다. 다윗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스보셋을 죽이고 그의 목을 가져온 자들은 보상 대신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죽은 뒤에는 손과 발이 잘려나가기까지 됩니다. 상관의 목을 벤 손이요, 그 목을 들고 밤새도록 걸어온 발입니다. 다윗의 분노가 읽혀지는 부분입니다. 어리석은 두 장교에게서도 배우고, 그들을 심판한 다윗에게서도 배웁니다. 사울 왕의 장군이던 아브넬이 죽고 난 뒤 사울 진영은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입니다. 이스보셋은 난국을 수습할만한 능력이 없어 보입니다. 모든 권력이 다윗에게로 향합니다. “어떻게든 살아 남아야 한다”는 본능적인 명령이 없다면 인류는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살아 남기 위해서 뭐든지 한다”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자기 목숨을 지키려고 애쓰는 것도 이해가 되는데 어린 자식을 위해 버티는 사람을 보면서 비난하거나 조롱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생존은 이렇게 단순한 주제가 아닙니다. 인간은 생명을 유지하는 것에 만족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있어도 삶은 없을 수 있고, 삶은 끝이 났어도 그 사람은 남아 있기도 한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이란 실로 여러 겹을 가진, “신기하고 놀랍게 만들어진 wonderfully and fearfully made” 존재입니다.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을 지내며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는 말이 여러번 들렸습니다. 삶의 가치, 사람의 가치를 생각하게 만드는 선언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봅니다. 대의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는 사람, 고난을 피해 배신도 불사하는 사람…그리스도의 사람은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살아도, 죽어도, 병에 걸려도, 회복이 되어도, 높임을 받아도, 천대를 받아도…내게 주님의 은혜는 얼마나 값진 것인지 깊이 깊이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Like

  4. 사울의 간교한 부하들의 행태를 보며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숙고해 봅니다,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건가를 심사숙고 할 나이입니다, 부끄럽지 않는 죽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Like

  5. 사울의 간교한 부하들의 행태를 보며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숙고해 봅니다,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건가를 심사숙고 할 나이입니다, 부끄럽지 않는 죽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Like

Leave a Reply

Fill in your details below or click an icon to log in:

WordPress.com Log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WordPress.com account. Log Out /  Change )

Google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Google account. Log Out /  Change )

Twitter picture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Twitter account. Log Out /  Change )

Facebook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Facebook account. Log Out /  Change )

Connecting to %s

%d bloggers like th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