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기상 22장: 탐욕의 말로

해설:

아기스 왕에게서 살아나온 다윗은 예루살렘 북쪽에 있던 아둘람 동굴에 피신합니다. 그 소식이 가족들에게 알려지자 형들과 친척들이 그를 찾아 옵니다. 그뿐 아니라 압제 받던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다윗의 은신처로 찾아와 사백여 명에 이릅니다. 다윗은 부모를 데리고 모압 왕에게 찾아가 잠시 동안 보호해 주기를 청합니다. 다윗의 증조 할머니가 모압 여인 룻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1-4절). 

아둘람에 은신하여 있던 중에 갓이라는 예언자가 다윗에게 그곳을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재촉합니다. 그 예언을 따라 다윗은 헤렛 숲으로 가서 자리를 잡습니다(5절).

한편 사울은 다윗이 부하들을 데리고 유다 땅에 다시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신하들에게 그 사실을 자신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호통을 칩니다. 그 때 에돔 사람 도엑이, 제사장 아히멜렉이 도피하던 다윗을 도왔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사울은 놉에 사람을 보내어 아히멜렉과 제사장 모두를 데려 오게 합니다. 사울이 왜 다윗을 도왔느냐고 따져 묻자 아히멜렉은 다윗을 변호하면서 하나님께서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답합니다. 사울은 대노하여 호위병들에게 아히멜렉과 제사장들을 처단하라고 명령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자 도엑이 나서서 여든 다섯 명의 제사장들을 쳐죽입니다. 그는 에돔 사람이었기 때문에 제사장을 처형하는 일에 과감했습니다. 사울은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여 놉에 군사를 보내어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를 죽여 버립니다(6-19절). 

이 살륙으로부터 살아남은 사람은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주신 예언에서 엘리의 자손 중 하나만 살아남을 것이라고 하셨는데(2:33) 그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비아달은 다윗에게 찾아가서 이 모든 일에 대해 보고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도엑을 처치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아비아달을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20-23절).

묵상:

오늘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약 1:15)는 말씀이 생각 났습니다. 사울은 탐욕에 눈 멀어 악에 악을 더합니다. 제사장들을 모두 죽인 것은 하나님께 대한 전쟁을 선포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에도 성이 차지 않아서 놉 사람들을 모두 살해합니다. 도엑은 인간 백정이라 할 만합니다. 그는 왕의 총애를 받고 싶은 탐욕에 사로잡혀 한 자리에서 여든 다섯 명을 처치합니다. 그 순간 그는 인간이기를 멈추고 악마로 변신한 것입니다. 사울과 도엑의 탐욕이 죄와 악을 낳고 그로 인해 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악행은 결국 그들 자신의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그 죽음은 육신만의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이었습니다.

우리 안에 사울도 있고 도엑도 있습니다. 그들이 특별히 악한 사람들이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에게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우리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욕심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우리도 언제든지 헐크로 변할 수 있습니다. 늘 깨어서 기도해야 할 이유입니다.  

4 thoughts on “사무엘기상 22장: 탐욕의 말로

  1. 시기와 질투로 인해 잘못된 길로 들어선 사울의 지속적인 악행을 읽으며 인간의 악행이 어디까지 이어질수있나 생각하면서 나치의 집권하에 유럽에서 저질러졌던 참옥한 집단 살해를 떠 오르게 합니다, 비밀경찰의 두목 아히히만이 재판정에 섰을 때 괴물이라 생각하며 눈여겨 봤지만 그도 우리와 같은 일반 사람이라는 것을 통해 우리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내 안에 있는 모든 악을 다스릴수있는 주님의 영이 자리잡기를 간구합니다, 십자가만이 내 저변에 깔려있는 시기 질투 탐심 분노를 이겨낼수있음을 고백하며 오늘 하루도 주님의 영이 다스리는 하루가 되도록 이끌어 주시 것을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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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사울의 광기는 가속 페달이라도 달은 듯이 빠르고 사납게 달려갑니다. 도엑이라는 에돔 사람이 옆에 있으면서 사울이 하라는대로 다 합니다. 다윗을 숨겨주었던 아히멜렉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할 말을 다 합니다. 사울은 놉 성에 사는 제사장 일가를 멸합니다. 정신이 나간 사람에게 운전대를 맡기면 그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울이 왕좌에 앉아 있는 한 이스라엘은 살아 있어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권의 초기와 말기는 극명하게 다릅니다. 미국은 작년 가을이 정권의 연장이냐, 끝이냐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새 대통령을 선택함으로써 정권은 바뀌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사울이 왕으로 세워지던 때부터 지금 까지를 돌아보면서 그의 인생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문학에서 내러티브 narrative 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등장인물과 배경, 사건의 3대 요소를 통해 스토리가 형성되고 갈등하다 해결되는지를 보여주는 구조가 전통적인 내러티브입니다. 모든 문학 작품은 이런 내러티브 구조 안에서 스토리라인이 흘러갑니다. 내러티브라는 말은 이제 정치와 사회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즉 세상을 읽는 데 쓰이기도 합니다. 사울의 이야기는 왕의 옷을 입었으나 왕으로 살지 않은 사람의 내러티브입니다. 18절에서 제사장 85명이 학살 당했음을 표현하기를 “세마포 에봇을 입은 사람(eighty-five men who wore the sacred robes)” 이라고 기록합니다. 옷은 임금의 옷인데 행동은 불량배요 살인마의 행동을 하는 사울을 보게 하는 귀절입니다. 사울의 시대는 블레셋을 진압하는 왕으로서는 공을 인정할만하나,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백성의 롤모델로서는 실패자였음을 보여 줍니다. 사울의 내러티브와 다윗의 내러티브는 전혀 다른 책을 읽는 것처럼 진행됩니다. ‘사람은 다 같다’라는 전제와 ‘사람은 다 다르다’라는 전제는 한 번에 하나씩만 적용하는 기준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은 다 같으면서 또 다 다르다’ 라고 말해야 정확도가 높은 말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구별된 삶,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의 삶은 어디가 같고 어디가 다른 것인지… 오래 오래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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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우리 인간의 죄는 종이와 같습니다. 종이 한장이 타는 것과 엄청나게 큰 종이로 만든 집이 타는 것은 동일한 원리입니다. 바로 불이 붙으면 언제든지 타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은 잘 관리를 해서 종이가 적거나 안타고 있는 것 뿐이지,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활활 타오르는 것이 인간의 죄성입니다. 남의 종이를 판단하기 보다는 내 종이가 타지 않도록 깨어있으며 기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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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제 생각과 마음속에 다윗과 아히멜렉을 닮은 부분이 있고 사울과 도엑을 닮은 부분이 있습니다.
    악한 생각과 마음이 항상 꿈틀 거리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총으로 거룩한 부분을 자라게
    하시고 악한마음을 온전히 깨끗하게 씻기를 원합니다. 해를 당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웃과 함께 말씀으로 무장하여 승리하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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