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기상 2장: 거룩한 것에 익숙해지는 위험

해설:

한나의 사무엘 봉헌 이야기에 이어 그의 기도문이 나옵니다(1-10절). 이 기도에서 한나는 먼저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고백을 합니다. 그런 다음, 그는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분이며 낮은 자를 높이고 높은 자를 낮추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경험한 것처럼, 인간의 운명은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에 자신을 맡기고 겸손히 살아가면 그분의 선한 손길을 경험할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런 다음, 엘가나는 한나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고, 사무엘은 엘리 곁에 있으면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11절)이 되었습니다. 성막에서 여러 가지 일을 거드는 심부름꾼이 된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엘리의 두 아들에게 초점을 돌립니다. 저자는 그들을 소개하면서 “행실이 나빴다”고 했고, “주님을 무시하였다”고 했습니다(12절).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무시한다면 당연히 나쁜 행실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어서 저자는 두 제사장의 타락상을 자세히 묘사합니다. 그들은 율법이 제물 중에서 제사장의 몫으로 규정한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구미에 맞은 고기를 함부로 건져다 먹었고(13-14절), 제물을 바칠 때도 율법 규정에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취향대로 행했습니다(15-16절). 주님께 바치는 제물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함부로 대하는 일이 되었습니다(17절).

한 편, 한나는 매 년 성소에 올라올 때마다 사무엘에게 옷을 새로 지어 입힙니다. 엘리 제사장은 한나의 마음에 감동하여 자녀의 축복을 빌어 주었는데, 그 기도가 응답되어 사무엘 아래로 아들 셋과 딸 둘을 더 낳았습니다(18-21절). 

그런가 하면, 엘리의 두 아들의 행패는 더욱 심해집니다. 심지어 성막에서 일하는 여인들을 범하는 일까지 일어납니다. 일이 이쯤 되자 엘리가 역정을 냅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이미 굳어질대로 굳어져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폐하기로 마음을 정하십니다(22-25절). 반면, 사무엘은 커갈수록 주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습니다(26절).

때가 되어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찾아와 비보를 전합니다. 천사는 엘리에게, 아론의 자손들을 택하여 제사장의 직무를 행하게 하고 제사장의 몫을 정해 준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그의 두 아들들이 정해진 몫이 아니라 가장 좋은 몫을 취하여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다고 말합니다(27-29절). 그들의 죄악이 너무도 심하여 하나님은 아론에게 준 약속을 취소하고 엘리의 집안에 저주를 내릴 것이라고, 그 천사는 전합니다(30-32절). 다만 그의 자손들 가운데 한 사람만은 살려 둘 것인데, 그 사람조차도 여러 가지 재앙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33절). 천사는 엘리의 두 아들이 변사를 당할 것이며(34절), 그 후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과 생각을 따라서 행동하는 “충실한 제사장”(35절)을 세우실 것이라고 전합니다. 그 때가 되면 엘리의 자손들은 생존을 위해 간청해야 하는 처지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36절).

묵상:

우리가 어떤 것을 거룩하다고 구별하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대할 수 있다고 때문입니다.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분이심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시간을 구별하여 하나님 앞에 머무는 이유는 그분이 내 삶의 주인임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하게 구별한 장소, 시간, 물질 그리고 사람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임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나에게 실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것에 익숙해지는 것은 영적으로 가장 위험한 일입니다. 익숙해지면 당연시 하게 되고, 당연시 하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처음부터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제물을 함부로 취급하고 성막에서 방자하게 행동한 이유는 거룩한 것들에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막에서 성추행을 일삼을 정도로 타락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목회자들이 영적으로 가장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거룩한 것들을 늘 접하다 보면 너무도 쉽게 익숙해지고 당연시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룩하게 구별된 성소에서 위선과 추행을 일삼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목회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거룩하게 구별한 물질, 시간, 장소 그리고 사람을 그에 합당하게 대하고 있는지 늘 물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함부로 대하는 큰 죄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thoughts on “사무엘기상 2장: 거룩한 것에 익숙해지는 위험

  1. 전 뭐라는 목사가 “하나님 너 까불면 죽어” 라고 외치던 모습이 눈에선합니다, 주님과 긴밀한 소통을 통해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 들여야 하는 믿음이 잘 못 뒤 틀어져 자신의 이익에 이용되는 억지가 종종 일어나는 기사들을 읽게 됩니다.
    주님을 경외하며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옳게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믿음을 간구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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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친한 사람일 수록 어느 정도 거리를 두라’는 말이 떠올립니다. 그 말의 뜻은 친한 사람일 수록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들이 많기 때문에, 조금 거리를 두면서 오히려 그들을 존중하고 귀하게 대하라는 속뜻이 있는 것입니다. 부부관계나 자녀관계를 보더라도, 자신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너무 편하게 막 대하는 경우들을 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일 수록 익숙해지지 않고, 존중하는 마음을 위해서 거리를 두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이 거리가 존재하기를 원합니다. 영적인 생활과 관계가 익숙해버려져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당연시 여기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 원합니다. 값싼 은혜로 버려지고 익숙해짐이 아닌, 날마다 새롭게 감개무량한 은혜로 여겨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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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익숙해 지는 것을 경계한다는 것은 상당한 훈련이 필요한 일입니다. 익숙해지기까지 시간과 공을 들였는데 익숙해진 것을 다시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낯선 것을 대하듯 하려면 것은 지금까지 들인 것보다 더 많은 공을 들여야 합니다. “Familiarity breeds contempt” 라는 말이 있습니다. 직역을 하면, 익숙함은 경멸을 낳는다는 뜻입니다. 사람과 친숙해지면 그에 대한 존경심 대신에 경멸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흔하게 보이는 것, 잘 아는 것은 우습게 여겨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선 제사장의 아들 – 요즘 표현으론 PK가 되겠지요 -이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문제가 나옵니다. 본문의 앞부분은 한나의 기도를, 중간은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이 저지르는 악행을, 끝부분은 엘리를 찾아온 하나님의 천사의 예언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나가 어질고 신실한 부모의 모델이라면 엘리는 대조적으로 위축되고 힘이 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나는 그 중간 어디쯤에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엘리가 아버지로서 실패한 이유나 아들들이 언제부터 저리 되었을까를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 경우로 옮겨집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교육의 90 퍼센트가 콘트롤의 문제입니다. 자식을 어떻게 키우는가의 ‘어떻게’ 부분은 부모에게 주어진 콘트롤의 범위입니다. 자식이 어릴 때는 콘트롤이 쉽습니다. 아이에게 있는 콘트롤 기능까지도 부모가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스스로 콘트롤 (운전, 결정)을 하게 되면 부모 몫의 콘트롤은 줄어 듭니다. 자식은 이만큼 자랐는데도 부모는 여전히 스스로 할 수 없어서 부모에게 의지하던 모습에 익숙한 눈으로 계속 보고 있으면 경멸 (contempt) 까지는 아닐지라도 그를 무시하거나 조심성 없이 대하는 일방적인 언사가 나오기 쉽습니다. 아직 철 들지 않은 자녀는 부모 안에 있는 선한 의도를 보지 못합니다. 부모 자신도 자기 속에 있는 사랑의 생각과 겉으로 드러나는 사랑의 표현이 어긋나는 것을 제대로 인정하거나 설명하지 못하고 넘어갑니다. 부부 사이에서도,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도 익숙함은 목표이자 장애물입니다. 잘 알아야 하는 대상이자 늘 미지의 세계로 남는 모순이 때론 극복해야 할 숙제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생각지 못했던 기쁨을 주기도 합니다. 성과 속의 긴장도 이렇겠지요. 익숙한 일상을 앗아가버린 코로나의 시간이 낯설어 괴롭기만 하던 그 때와 지금은 어느새 그 간격이 많이 커졌습니다. 그렇게 느껴지는 지금이 익숙함을 버리고 새 눈으로 봐야 할 때겠지요. 경계에 놓인 시간 liminal time 을 잘 사는 지혜를 구합니다. 주님 안에서 만나는 모든 시간 앞에 나도 한나처럼 찬양의 기도를 올리며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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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하나님의 소유, 거룩한 백성, 왕과 같은 제사장으로 인정해주신 사랑을 곧 잊고 주님을 등지고
    자주 살아 왔습니다. 모든 하는일과 생활이 주님께 들이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어야 하는데
    세상 풍조에 따라 살아가는 이기적이고 초라한 인생입니다. 십자가를 이웃과 더불어 꼭 붙잡고
    승리하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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