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9장 1-27절: 그 날이 오기까지

해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여리고에 이르십니다. 그곳에는 삭개오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었고 부자였습니다(2절). 세관장은 총독으로부터 한 지역의 세금을 징수하는 책임을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당시 세관장들은 배당 받은 액수에 자기 몫까지 더하여 동족을 착취했습니다. 삭개오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을 보고 싶은 열망이 있었습니다. 권력과 물질로 채워지지 않는 내적 갈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여리고에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보러 나갔지만, 키가 작았기에(3절) 그분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뽕나무”(실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서(4절) 예수님이 지나가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세관장으로서 체면 구기는 일이었지만 그는 괘념치 않았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향한 갈증이 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아시고 그에게 다가가 내려 오라고, 오늘은 그의 집에서 머물겠다고 하십니다(5절). 그로 인해 사람들은 수군거립니다(7절). 거룩한 분이 죄인의 우두머리 집에 가셨으니 그럴 만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께 융숭한 대접을 한 다음,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8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동안 그의 내적 갈증이 채워졌고, 그러자 그는 물질에 대한 집착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앞에서 본, 돈 많은 지도자(18:18)와는 전혀 다른 태도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9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10절)고 덧붙이십니다.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두고 수군댄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이르시자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하고”(11절)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유 하나를 들려 주십니다. 주인공은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려고 먼 길을 떠난 어떤 귀족(12절)입니다. 그는 길을 떠나기 전에 종 열 사람을 불로서 각각 한 므나씩을 주고 그것으로 장사를 하게 했습니다. ‘한 므나’는 성인 노동자의 석달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오늘로 치면 ‘마이크로 패이낸스'(가난한 사람들에게 소액의 자금을 제공하여 개인 사업을 하도록 돕는 일)를 해 준 셈입니다.  그가 떠난 후에 시민들은 사절단을 따로 보내어 그 귀족을 왕으로 세우지 말아 달라고 청원을 합니다(14절). 

하지만 그는 왕이 되어 돌아 왔고, 종들을 불러 장사 결과를 알아 봅니다. 어떤 종은 한 므나로 열배를 남기고, 어떤 사람은 다섯 배를 남겼는데, 어떤 사람은 한 므나를 그대로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한 므나를 그대로 보관하고 있던 사람은 “주인님은 야무진 분이라서, 맡기지 않은 것을 찾아가시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시므로, 나는 주인님을 무서워하여 이렇게 하였습니다”(21절)라고 말하면서 주인에게 탓을 돌립니다. 주인은 그를 책망하고 그의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를 남긴 사람에게 주라고 말합니다(24절). 주인은 “가진 사람은 더 받게 될 것이요,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가 가진 것까지 빼앗길 것이다”(26절)라고 덧붙입니다. 종들과 결산을 끝낸 주인은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했던 사람들을 데려 와 죽이라고 명령합니다(27절).

묵상:

주전 4년에 헤롯 대왕이 세상을 떠나자 헤롯의 아들들은 로마 황제에게 가서 자신이 왕위를 잇게 해 달라고 로비 합니다. 그 때 유대 지도자들도 사절단을 보내어 더 이상 헤롯 가문이 통치하지 않게 해 달라고 청을 넣습니다. 황제 티베리아스는 헤롯의 아들들의 손을 들어 주어 헤롯 대왕이 다스리던 영토를 넷으로 분할하여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분봉왕’으로 불립니다. 황제로부터 유다 지방의 분봉왕으로 임명 받은 헤롯 아켈라오는 부임하자 마자 로마에 사절단으로 갔던 유대 지도자들을 처형합니다. 불행하게도 그는 주후 6년에 세상을 떠나고 그 이후로 로마 황제는 총독을 보내어 직접 통치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소재로 사용하여 재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알았던 사람들은 그분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로마 군대를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전에 당신이 먼저 고난을 당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임하는 것은 그분이 다시 오실 때에 일어날 일입니다. 그 때가 이르기까지 믿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것들(생명, 시간, 물질, 사람, 사명 등)에 신실해야 합니다. 그분이 다시 오실 때, 믿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맡겨진 일에 얼마나 신실했는지에 대해 물으실 것입니다. 

삭개오는 자신에게 맡겨진 물질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렇게 실천하기로 결단합니다. 그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9절)고 선언하십니다. 그렇게 시작된 구원은 마지막 심판 때에 완성되어야 합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시작된 구원’이 ‘지속되도록’ 신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4 thoughts on “누가복음 19장 1-27절: 그 날이 오기까지

  1.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에도 불구하고,주님을 만나기위해 체면을 채리지않고 발버둥치는 믿음을
    원합니다. 집안의 구원을 위해 세상이 추구하는 부귀영화를 포기하는 의지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인생의 마지막 chapter 에 와 있는데도 열매가 너무나 부족합니다. 오직 십자가의 은혜만 의지
    합니다. 이웃과 함께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칭찬하시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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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열린 마음으로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알려고 나무에 올라가 기다리는 삭개오 같이 주님을 향한 내 마음이 늘 열려있고 주시는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어 봅니다.
    주님께서 맡겨준 므나로 성실하게 장사를 해서 더 많은 이익을 만들어 내는 거 같이 지금까지 나에게 맡겨진 모든 것을 잘 사용하여 주님이 오시는 그날 주님앞에 떳떳이 나서는 믿음을 구합니다.
    다가오는 부활절을 신실한 마음으로 준비하게 하시고 주님의 십자가를 향한 내 마음이 옳바로 서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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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신실한 종으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물질과 시간, 그리고 사명등.. 여러가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모든 것들을 신실하게 하나님의 마음을 향해서 사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다시 한번 말씀을 통해서 마음을 잡고, 하나님의 청지기로서의 삶을 기억합니다. 성화의 과정이 어렵고 힘들지만, 항상 신실하게 하나님의 마음을 바라보며 온전한 새하늘과 새땅을 향해서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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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삭개오의 이야기에는 남다른 울림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아픔을 헤아려 주십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재산을 남들과 나누겠다는 결단으로 이에 응답합니다. 삭개오는 차별과 소외를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세리장이라면 사람들이 기피하는 사람입니다. 할 수 없이 만나는 사람이지 좋아서 만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가 부자였다는 사실은 보상 compensation 일 뿐 업적이나 노력의 결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삭개오는 키가 남보다 훨씬 작습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키가 크다 작다를 놓고 자기도 모르는 편견이 작동한다고 합니다. 키가 큰 사람을 더 잘 믿고, 더 선량하게 보고, 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한편 키 작은 사람은 반대로 여깁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신장만큼은 남자가 여자보다 더 큰 차별을 받는다는 점입니다. 즉, “보통보다” 키가 작은 남자는 그런 여자보다 더 크게 차별을 겪는답니다. 요즘엔 차별과 소외에 대한 인식이 전보다 예민해졌습니다. 남의 신체를 놓고 이러쿵 저러쿵 말하는 것이 저급하고 비인간적인 태도라는 것을 많이 깨닫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어려서부터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를 얼마든지 “뜯어 고치고” 살 수 있는 지금도 키 만큼은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과의 짧은 만남에서 삭개오는 지금까지 품고 있던 아픔과 분노가 녹아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삭개오의 이야기는 예수님과의 만남이 가져오는 변화를 정말 잘 보여줍니다.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처럼 삭개오도 새로와졌습니다. 하지만 그의 새로와짐은 내적인 소생입니다. 예수님은 키가 자라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속은 다 바뀌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삭개오를 묵상하다 그 뒤에 남들처럼 한 므나를 받고 고이 싸 두었다 도로 내놓는 종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니 교회를 오래 다니고도 아무런 변화나 발전이 없는 상태를 꾸짖으시는 것 같이 들립니다. 세상을 바꾸는 데 기여하지 못하는 교회를 나무라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삭개오는 적극적인 사람입니다. 남들의 시선이나 수근거림을 이겨낼만한 내공이 쌓인 사람입니다. 아픔을 힘으로 만들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교회가, 그리고 크리스찬이 당면한 문제는 아픔 없이, 보호 받으며 살아왔다는 점인지 모릅니다. 편안함에 길들여진 내 모습을 봅니다. 주여, 내게 맡기신 복을 잘 감당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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