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5장 1-7절: 어리석은 목자

해설:

예수님의 주변에는 “세리와 죄인들”(1절)이 몰려 다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조건 없이 환영해 주시고 식탁에서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여기서 “죄인”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기준에서 죄인으로 판단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어려운 생활 환경 때문에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런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비판 했습니다. 예수님의 영적 수준이 그만큼 낮다는 의미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이 비판은 예수님의 사역 기간 내내 따라 다녔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예수께서는 세 가지의 비유로 응답하십니다. 

첫째는 “잃은 양의 비유”(3-7절)입니다. 내용으로 본다면 “어리석은 목자의 비유”라고 이름 짓는 것이 더 좋아 보입니다. 양 백 마리를 돌보고 있는 목자가 그 중에서 한 마리를 잃습니다. 그러자 이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찾아”(4절) 다닙니다. 그것이 그의 어리석음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 한 마리를 포기하고 아흔아홉 마리를 지킬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자는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느라 아흔아홉 마리를 위험에 빠뜨립니다. 이 목자는 기본적인 셈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여 잃어버린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자기 어깨에 메고”(5절) 집으로 돌아와 “벗과 이웃 사람”(6절)을 불러 모아 기쁨을 나눕니다. 

이 비유 끝에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7절)라고 덧붙이십니다.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7절)은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에 대한 암시적인 비판입니다.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은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들이 잃어버린 양들입니다.

묵상:

예수님의 비유에는 항상 ‘이해 못할 점’이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이해 못할 점’은 아흔아홉 마리 양을 “들에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 목자의 어리석음에 있습니다. 이 어리석음을 없애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1) 아흔아홉 마리 양을 다른 목자에게 맡겼을 것이라거나 2) 양우리에 안전하게 가두어 놓았을 것이라고 설명 합니다. 그것은 이 비유의 요점을 가리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들에 두고”라는 말로써 목자의 어리석음을 강조하십니다. 그 어리석음은 한 마리 양에 대한 목자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목자에게 양이 백 마리 있었지만 그는 한 마리 한 마리를 전부로 여겼습니다. 한 마리 양에게 목자는 백분의 일의 사랑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백의 사랑 전부를 주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비밀입니다. 어거스틴이 <고백록>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세상에 사랑할 대상이 하나 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 각자를 대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칠십억 분의 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사랑은 너무 커서 칠십억 분의 일로 나누어도 나에게는 여전히 절대적인 분량으로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당신의 사랑 전부로 나를 대하십니다. 

그 사랑이 십자가에서 드러났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에서 그 절대치의 사랑을 발견하면 우리는 더 이상 같은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가장 강력한 변화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4 thoughts on “누가복음 15장 1-7절: 어리석은 목자

  1. 길 잃고 방황하는 어린양을 찾기위해 모든것을 포기하는 주님 닮기를 원합니다.
    잃은 동전을 찾기위해 모든것을 뒤로미루고 동전을 찾아내어 이웃에게 잔치를
    베푸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세상 가치관에 머리를 굴리지 않고 어리석게 보이는
    예수님의 영혼 구원 사역에 이웃과 함께 동참하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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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오늘 주시는 말씀은 비 논리적이고 비 이성적이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감성을 느끼며 주님의 사랑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또 드라크마 하나를 잃은 여인을 통해 우리 한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사랑의 대상입을 깨닫고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오늘 하루도 이성보다는 영성으로 주님을 섬기며 내 자신을 돌아보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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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부모된 마음으로 그 하나님의 사랑을 감히 헤아린다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됩니다. 형제나 자매가 있는 경우, 누구는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자녀인 모두를 각각 있는 모습 그대로 100% 사랑하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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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들판에 남겨둔 아흔아홉 마리 양에 대해서 궁금했던 적이 없었는데 해설을 읽으니 그쪽으로 신경을 쓰는 사람도 있는가 봅니다.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해도 어쩔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인 사회지만 그렇기 때문에라도 소수의 불편과 희생을 조명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Black Lives Matter 운동을 두고 왜 흑인만 소중하냐고 묻는 사람은 아흔아홉 마리 양은 누가 지키느냐고 묻는 사람과 비슷한 생각인지 모릅니다. 3월 한달은 여성 역사의 달 women’s history month 이고, 어제는 국제 여성의 날로 여성의 삶을 기리기도 했습니다. 나는 엄마가 아주 늦게 얻은 외동 딸입니다. 외동으로 자랐다고 하면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이기적이고 버릇 없는 사람을 떠올리기 때문에 잘 모르는 사람 앞에선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잘 사는 집은 아니었지만 혼자 컸기 때문에 나 필요한 것은 다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하나 만 키웠다고 남들보다 덜 고생했다든가 쉽게 거저 키웠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99대 1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99나 1은 숫자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마리를 키우다 한 마리가 없어졌어도 여전히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나섰을 것입니다. 다섯 명의 자식을 다 대학에 보낸 어머니나 하나 있는 자식을 대학에 보낸 어머니나 다 장하고 어려운 일을 한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과 율법교사들은 스스로를 중요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사니 자기들은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이 사람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기준을 성인 남자로 삼은 사회에서 여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과 같습니다.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고 갈 때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논리와 감성이 기준이 되는 사회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함께 먹기까지 (2절)”하는 사회는 1을 위해 99를 내팽기치는 사회가 아니라 하나 하나 다 자기 얼굴과 이름과 자리가 있는 사회일 것입니다. 알게 모르게 바리새파 사람처럼 생각하고 판단하는 나를 용서해 주소서.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다니시는 주님 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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