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3장 22-35절: 문이 아직 열려 있을 때

해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실 때 어떤 사람이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23절)라고 여쭙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누가 구원을 받겠는지 그리고 구원 받을 사람은 얼마나 될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해 답하지 않으십니다. 부질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24절)고 말씀하십니다.  몇 사람이나 구원 받을까를 두고 따질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구원 받을만한 사람이 되도록 힘쓰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짧은 비유 하나를 말씀하십니다(25-27절). 집 주인이 문을 열어 놓고 사람들에게 들어 오라고 청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시간이 되어 주인이 문을 닫아 겁니다. 사람들은 그 때에야 문을 두드리며 열어 달라고 간청합니다. 하지만 주인은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이 비유는 마지막 심판에 대한 비유입니다. 지금은 문이 열려 있습니다. 회개하고 믿는 것이 그 문을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초청을 거부 합니다. 그들은 바깥으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28절)입니다. 반면, 많은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꼴찌가 첫째 될 사람이 있고, 첫째가 꼴찌가 될 사람이 있다”(30절)고 덧붙이십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던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교사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나고, 그들이 죄인이라고 하시하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받아들여진다는 뜻입니다. 

그 때 예수님에게 우호적인 바리새파 사람 몇이 와서 헤롯의 살해 의도를 전하면서 피신하라고 권고합니다(31절). 그러자 예수님은 헤롯을 “여우”라고 부르면서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당신의 사명을 다할 것이라고 대답하십니다(32-33절). “사흘째 되는 날”(32절)은 가까운 미래를 의미합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운명을 내다 보시면서 탄식하십니다(34-35절).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선택한 도시입니다. 그래서 “우주의 배꼽”이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종교 권력자들이 진을 치고 예언자들을 박해 했고 때로는 살해 했습니다. 이제 그 죄가 예수님의 죽음에서 절정에 이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죽음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겠지만, 그토록 죄를 쌓아 온 예루살렘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35절) 할 그 때까지 즉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묵상:

도시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겠다고 하신 성전으로 인해 하나님의 눈동자요 세상의 중심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택함 받은 그 도성은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더럽히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평화의 도시’라는 이름은 허명이 되었고, ‘불화의 도시’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도시는 인간의 죄악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보여 줍니다. 주후 70년에 로마 제국에 의해 파괴된 이후 지금까지 예루살렘은 버림 받은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렇게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천 년 전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보며 거룩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예루살렘의 현 상황은 회개 하기를 거부하는 인생의 종말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당신의 눈동자처럼 사랑하고 아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죄악 속에서 멸망 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셔서 회개하고 회복할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문을 들어가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고 그분의 다스림 아래에서 살아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렇게 될 때 진정한 평화가 우리를 다스리게 됩니다. 하지만 복음의 초청을 거부하고 우리의 욕망대로 살기를 선택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지금의 예루살렘 도성처럼 해결할 방법이 전무한 불행 덩어리가 되어 버립니다.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우리의 인생을 버리는 최악의 선택입니다. 

3 thoughts on “누가복음 13장 22-35절: 문이 아직 열려 있을 때

  1. 십자가 은혜안에서 낮아지고 작아지기를 원합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신작로에 등을 돌리고
    좁고 험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때가 왔음을 깨닫고 늦기전에 주님품
    안에 안기기를 간구합니다. 이웃과 함께 천국 잔치를 세상에 알리며 초대하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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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좁은 문 보다는 크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원했던 지난날들을 되새겨 봅니다, 또 그 문앞에서 망설이며 부정적이던 내 자신을 발견합니다, 예루살램같이 거부하며 탐욕에 빠지지 않게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작동하기를 간구합니다.
    주님이 부를 때에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하고 담대히 나가는 믿음이 오늘 하루를 지배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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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메시지 성경은 “좁은 문”을 풀어서 설명합니다. 일반 영어성경 (NRSV) 은 “Enter through the narrow door” 라고 번역하지만 메시지 성경은 “The way to life – to God! – is vigorous and requires your total attention” 이라고 말함으로써 좁은 문과 큰 문이 있으면 좁은 문이 천국(구원)으로 이르는 길이니 잘 선택하라는 뜻보다 늘 열심을 다하고 백퍼센트 하나님께 집중해서 사는 태도와 자세로 살라는 명령으로 해석합니다. 어떤 문으로 들어갈지 고민하는 것이나 삶의 태도를 점검하는 것이나 선택의 의무는 여전히 우리 몫입니다. 26-27절에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님께서는 저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라며 들여보내 달라고 청하는 사람들을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며 문을 열어주지 않는 주인을 보면서 “낯익은 것”과 “아는 것” 사이에 분명하게 있는 간격을 보게 됩니다. 아는 사람과 친구가 구분되듯이, 남이 읽고 말해 준 책과 내가 읽은 책이 다르듯이. 좁은 문, 좁은 길의 이미지는 바늘구멍의 이미지와도 연결됩니다. 내 몸이 크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적당히 알고, 적당히 수고하며, 적당히 노력하는 정도로는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허물 많고 부족한 죄인들을 내치지 않으시는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는 차갑고도 매서운 경고를 하십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선전포고를 하십니다. 지도자와 지식인 그룹한테 더 큰 책임이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얼렁뚱땅, 대강대강, 오늘 못하면 내일 하자, 남들 하는대로, 적당히…이런 생각과 자세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말씀으로 받습니다. 아버지가 그렇지 않은데 자식이 그렇게 살면 안되겠지요. vigorous! total attention! 주님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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