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0장 25-42절: 자기의의 위험

해설:

그 때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25절)라고 묻습니다. 그의 의도를 간파하신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고 되어 있는지를 물으십니다(26절). 그는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여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영생의 길이라고 대답합니다(27절). 아마도 그는 누군가를 통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28절)라고 답하십니다. “살 것이다”라는 말은 “영생을 얻을 것이다”(25절)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율법교사는 기다렸다는 듯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29절)라고 반문합니다. 율법교사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유대인들 중에서도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만이 이웃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방인은 이웃에 들지 않고, 동족인 유대인들 중에도 율법을 잘 지키지 않으면 이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 율법 교사는 이 질문으로써 자신의 의를 과시할 빌미를 만들려 했습니다. 그의 속셈을 아신 예수님은 비유로 답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나 거의 죽게 된 “어떤 사람”(30절)은 유대인입니다. 얼마 후에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그를 보았지만 그냥 지나칩니다(31절). 그 다음 레위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를 보았는데 그도 역시 그냥 지나칩니다(32절).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유대인들 중에서 하나님의 뜻에 가까이 있을 가능성이 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냥 지나친 것입니다. 죽은 줄 알고 두려워서 그랬을 수도 있고, 지체할 시간이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나타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으로 간주했고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에 대해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평소에 유대인들로부터 무시와 천대를 받았던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남은 목숨마져 끊어 놓고 갈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는 죽어가는 그 유대인에게 응급 조치를 하고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줍니다(33-34절). 그 밤이 지나자 그 사람은 두 데나리온(이틀치 일당으로서 그가 가지고 있던 전부였을 것입니다)을 주인에게 맡기고 그 사람을 돌보아 달라고 부탁합니다(35절). 

비유를 다 들려 주시고 나서 예수께서는 율법 교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36절) 그러자 율법 교사는 차마 “그 사마리아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37절)라고 답합니다.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와 말씀으로써 예수님은 두 가지 일을 이루십니다. 하나는 그 율법 교사의 자기 의를 무너뜨리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 예수께서 어느 마을에 들어가셨을 때 마르다라는 여인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청합니다(38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 마르다는 손님 대접을 위해 분주했습니다. 그런데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는 겁니다(39절). 마르다는 그 모습으로 인해 속이 상하여 예수님에게 다가와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40절)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야, 마르다야”(41절) 하고 부르십니다. 이름을 두 번 부르는 것은 애정을 담은 표현입니다. 그리고는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 뿐이다”(42절)라고 답하십니다. 

“주님의 일”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은”이라는 뜻입니다. 여러 가지 일로 분망한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마리아는 말씀 듣는 것에 전념하고 있었기에 칭찬을 받은 반면, 마르다는 여러 가지 일로 마음이 갈려 있었기에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마르다가 한 일(봉사)보다 마리아가 한 일(말씀 듣는 일)이 더 나은 선택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 일로 분주한 마르다의 마음보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고 있는 마리아의 마음이 더 좋은 선택이라는 뜻입니다. 만일 마르다가 예수님과 그 일행을 대접하는 기쁨에 젖어 그 일에 몰두했다면 그도 역시 칭찬 받았을 것입니다.

묵상:

예수님은 ‘자기의'(self-righteousness)를 가장 심각한 죄로 여기셨습니다. 어떤 행동을 해 놓고 “나는 이만큼 의롭다” 혹은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 생각과 태도는 자신의 의로움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흥정하려 들게 하고, 자신만 못한 사람들에 대해 영적 우월감을 가지게 만듭니다. 그것이 당시 많은 유대인들의 공통된 문제였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더욱 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 놓고 칭찬 받으려 했고,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차별하고 정죄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찾아와 영생의 길을 물은 율법교사와 예수님의 일행을 대접하기 위해 분주했던 마르다는 자기의를 인정 받고 싶은 유혹에 흔들렸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율법교사는 율법을 잘 지켰으니 영생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인정을 받고 싶었고, 마르다는 동생 마리아보다 잘 하고 있다는 칭찬을 받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무엇인가를 행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로부터 인정 받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해 응답하는 행동이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큰 일도 자랑하려 하지 않고, 공으로 인정 받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온 몸을 불살라 바쳐도 부족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본분을 안다면 최선을 다하고 나서 조용히 물러나 주님의 은혜를 구할 것입니다. 

4 thoughts on “누가복음 10장 25-42절: 자기의의 위험

  1. 병들고 상처받고 방황하고 쓰러저있는 사람에게 이웃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눈으로
    저희들이 세상을 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너무 서둘지않고 주님안에서 먼저 말씀을 경청
    하며 묵상한다음에 주님사랑, 이웃사랑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세상에 알리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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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사회생활을 하면서 끝임없이 들어내고 싶어하는 자기의 “의”가 바로 가인의 후예임을 깨닫게 해 주시는 주님, 나 자신 이 아니라 주님 뜻을 따르는 사마리아 인 같이 우리의 이웃에게 다정하게 다가가서 그들과 어우러 지는 지혜를 구합니다..
    가시덤풀 같은 마음으로 매사에 쫓가며 주님의 말씀을 읽으면서도 삶의 염려와 근심으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 저에게 마리아와 같은 믿음을 주시고 오늘 하루도 주님께 맡기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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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강한 사람들은 더욱 더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행동 혹은 자신의 어떠함을 사람에게 보여주고 인정받을 때, 자신의 존재가 인정되어지는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러한 사람입니다. 본문의 말씀 속에서 의를 인정받으려는 율법학자요, 마르다와 같은 사람입니다. 자신의 행위와 업적으로 남을 비판하고 무시한 부분들을 용서를 구합니다. 내 삶에 은혜와 긍휼이 넘치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음성에 민감해지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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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경건하게 살려는 사람은 자기의의 올무에 넘어지지 않도록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유교적 사상과 배움의 혜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국인은 특별히 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 율법을 지켜야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여겼던 유대인의 생각은 출발점은 거룩과 경건일지라도 적용과 방향성에 있어 되려 심판을 받게 만드는 길이 되어 버렸습니다. 미국 여선교회 워크샵에서 배운 것 중에 “Doctrine of Discovery (혹은 Discovery Doctrine)” 이라는 법률 용어가 있습니다. 법적인 개념이지만 역사적인 배경을 보면 사회를 이끄는 주요 사상이고 이 사상은 지금까지도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15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에 걸쳐 왕성했던 “프레임/프레이밍”입니다. 콜럼버스의 토착민 정복은 북미는 물론 남미에서도 복음(Gospel), 왕의 영광(Glory), 황금(Gold) 이 세가지 3G를 목표로 삼았으며 이를 위해서는 잔혹한 방법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콜럼버스 데이”라는 휴일 이름을 “원주민의 날 (Indigenous Peoples Day)” 이라고 바꿔 부르는 주가 여러 곳 있습니다. 콜럼버스의 뒤를 이은 탐험 정복가들이 토착민의 땅을 빼앗을 수 있는 합법적인 근거로 디스커버리 독트린을 사용했습니다. 법의 내용을 단순(무식)하게 걸러내면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므로 그들의 땅을 정복해 개발해도 된다는 논리입니다. 이 법은 지금도 유효한 걸로 압니다. 미개한 원주민, 기독교의 하나님을 모르는/거부하는 사람은 개명한 신도들과 같은 취급을 받지 않는다, 즉 사람 대접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정당화시킵니다. 은연 중에 나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나…워크샵에서 돌아봤습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자기의의 문제는 교만과 이기심처럼 겉으로 잘 드러나는 문제가 아니라서 다루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동기와 의도를 조종하며 언제나 쉽게 합리화할 수 있어 더 끈질깁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사마리아인 이야기에 연이어 나오는 것을 자기의와 연관시켜 보게 하신 목사님의 해설이 참 귀합니다. 지금까지는 두 자매의 다른 성격, 다른 선택 정도로만 이해해 온 이야기를 자기의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좋은 생각거리가 됩니다. 더군다나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 일을 하느냐는 태도를 들여다 본다는 점에서 더욱 풍성한 묵상의 지평이 열릴 것 같습니다. 코로나로, 이상 기후로, 실직과 실패로 아파하는 이웃을 따뜻한 시선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은 다 사탄의 조작에서 나온 것임을 봅니다. 자기의로 유혹하는 사탄의 술수를 이기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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