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9장 28-45절: 십자가의 거리낌과 어리석음

해설:

그로부터 여드레쯤 되었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십니다(28절). 그분이 세 제자만 따로 데리고 갈 때는 항상 특별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그 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십니다. 기도 하던 중에 그분의 모습이 변화하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그분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대화의 주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그의 떠나가심”(31절)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메시아로서 예수께서 결국 겪어야 할 고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을 나누신 것입니다. 모든 율법과 예언이 메시아의 죽음을 가리키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사이에 베드로와 다른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졸고 있다가 깨어나 그 광경을 봅니다(32절). 모세와 엘리야가 막 떠나려 하자 베드로는 세 분을 위해 초막 세 개를 지어 드리겠다고 제안합니다(33절). 너무도 신비한 광경에 압도되어 횡설수설 한 것입니다. 그 때 구름이 그들을 덮었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35절)는 음성이 들립니다. 구름이 걷히자 모세와 엘리야도 사라졌습니다. 제자들은 그 이후로 한 동안 아무에게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36절).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야 그들은 그 사건의 의미를 깨닫고 말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여드레 전에 예수께서 “여기 서 있는 사람 가운데는,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볼 사람들이 있다”(27절)고 하셨는데, 세 제자에게 그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날이 새어 예수님과 세 제자가 산 아래로 내려 오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 왔고(37절), 그들 중에 귀신 들린 아들을 데리고 와서 치유해 달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38절). 예수님이 없는 동안에 다른 제자들에게 치유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아무도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39-40절).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 없음에 대해 탄식하신 다음(41절) 그 아이를 데려 오게 하여 귀신을 쫓아 내십니다(42절).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감사 드립니다(43절). 

모두가 예수님의 능력에 놀라 신기해 하고 있을 때 예수께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또 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인자는 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갈 것이다”(44절). 하지만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그 말씀의 뜻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45절). 메시아에 대한 그들의 선입견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말씀의 의미에 대해 “묻기조차 두려워하였”(45절)습니다. 뭔가 불길한 것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묵상:

하나님이 구원자로 보내신 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은 인간적인 사고 방식에는 너무도 낯설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고전 1:23)라고 했습니다. ‘거리낌’이라는 말은 거부감이 드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신적인 구원자가 인간에게 무력하게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말은 누가 보아도 어불성설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복음은 누구에게나 어렵습니다. 인간의 손에 의해 가장 수치스러운 방식으로 죽은 한 죄수가 하나님의 메시아라는 사실도 믿기 어렵고, 그 죽음이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도 믿기 어렵습니다. 2천 년 전에 예수님을 가까이 따랐던 제자들에게도 어려웠고, 오늘 우리에게도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에게 변화산의 체험을 허락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싶습니다. 율법의 전수자인 모세와 예언자들의 대표자인 엘리야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광경을 보게 한 것은, 그분의 죽음이 우연히 발생한 사고가 아니라 모든 율법과 예언을 성취하고 완성하기 위한 것임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사건을 본 후에 세 제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마음에 품어 둡니다. 너무도 신비한 광경을 보면 함부로 발설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야 그들은 변화산의 사건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 

4 thoughts on “누가복음 9장 28-45절: 십자가의 거리낌과 어리석음

  1. 오래전에 있었던 체험이 점점 기억에서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숨질때까지 주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며 살기를 원합니다.저희들의 기도가 부족합니다.
    주위에 스트레스와 질병으로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치유의 은총을 간구합니다.매일아침 말씀을
    통해 저희들의 삶이 주님이 기뻐하시며 받으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아멘.

    Like

  2. 모세와 예리야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께 전달되고 성취되는 과정을 그 당시의 유태인이나 이방인들이 못 받아들인 것 같이 작금의 세대에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사라중에 하나인 나에게 성령의 은혜속이 스스로 녹아 들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병을 곷시며 가르치시고 기적을 통해 나타나는 하늘 나라의 입장권이 예수님의 십자가임을 상기합니다, 그 십자가가 내 하루의 일상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빙판길에 실족하는 일이 없도록 주님의 천사들이 돌봐주기를 간구헙ㄴ더.

    Like

  3. 그 놀라운 복음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이 감격스럽습니다. 십자가 복음이 거리낌이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여겨질 수 있으나, 그 십자가 복음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음을 기억하고 또 기억합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크리스챤들 중에서 십자가의 복음에 대해서 회의를 가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참히 그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사실과 속죄를 부정하며 다른 방법으로 혹은 다른 생각의 구원을 이야기 합니다. 그들의 이야기의 결론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너무 폭력적이며,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합니다.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에게는 수치스럽고, 거리끼는 복음이 내 삶에서 드러나며 믿음으로 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Like

  4. 기도하러 가신 산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을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잠을 이기지 못하고 졸았습니다. 졸다 깨서 보는 광경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고, 설령 졸지 않고 잘 지켜 보고 있었더래도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깨닫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서로 뭘 본거지? 의논해도 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도 급작스러운 죽음이 두렵고도 허망해서 이 산에서 경험한 것과 연결시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뒤에야 예수님과 보낸 시간 전체를 다시 회상하며 하나님의 큰 그림을 퍼즐 맞추듯이 맞추어가며 의미를 찾아냈을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앞뒤 연결을 못 시키는 일이 허다합니다. 생각하고 사는 일,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면서 갖는 이런저런 소견도 한 때 한 구석 만 설명할 수 있을 뿐 큰 그림을 보고 아하! 소리가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인생은 미완성’이라는 노래 제목이 제법 똑똑한 선언으로 들리는 이유입니다. 산에 따라간 제자들이 어리둥절해 하는 것이나, 마을에 남아 있던 제자들이 사람들을 돕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던 것이나 다 우리의 모습 같습니다.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 What a generation! No sense of God!” “You faithless and perverse generation!” 21세기 우리 세대를 향해 답답해 하시는 주님의 외침인지도 모릅니다. 엘리야나 모세가 이끌던 세대도 이랬습니다. 믿음이 없고 제멋대로였습니다. 그대로 둔 인간의 모습은 언제나 이런지도 모릅니다. 주님이 오셔서 눈을 열어 주시고, 잠을 쫓아내 주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주셔야 정신이 드는 지도 모릅니다. 오늘 귀신에게 시달리다 예수님이 내쫓아주셔서 온전하게 되는 아이도 그 아버지에게 하나뿐인 아들입니다. 아이를 고쳐주심으로 부모의 삶까지도 회복시켜 주시는 은혜를 봅니다. 화성에 우주 탐사선이 잘 도착해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우리 전 세대들은 믿지 못할 일입니다. 앞으로도 믿을 수 없는 일들은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나의 믿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무엇을 보고자 하는지 묵상합니다. 보는 것을 믿는 것 seeing is believing 도 중요하지만, 믿기에 보게 되는 것을 더 원합니다. You are what you believe. 믿음의 눈으로 보게 하소서.

    Like

Leave a Reply to Jason H Yoon Cancel reply

Fill in your details below or click an icon to log in:

WordPress.com Log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WordPress.com account. Log Out /  Change )

Google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Google account. Log Out /  Change )

Twitter picture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Twitter account. Log Out /  Change )

Facebook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Facebook account. Log Out /  Change )

Connecting to %s

%d bloggers like th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