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서 9장: 새끼 나귀를 타신 이유

해설:

스가랴는 유다 주변 나라들에 대한 예언을 전합니다(1-8절). “주님의 말씀이 내린다”(1절, 2절)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북쪽과 동쪽 그리고 남쪽에 있던 나라들은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자랑했고 번갈아 가면서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들이 이스라엘을 더 이상 괴롭히지 못하도록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9절)이 오실 것을 예언합니다. 이것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입니다. “공의로우신 왕”은 “의로우신 왕”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신실한 것이 ‘의’입니다.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라는 말도 “구원 받은 왕”이라고 번역해야 옳습니다. 여기에는 메시아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다가 죽게 될 것이라는 암시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 받은 왕”이라는 말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 줄 것입니다. 그가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은 군사력이 아니라 섬김과 희생으로 다스릴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이 땅에서 “병거”와 “군마”를 없애고 평화가 자리 잡게 하실 것입니다(10절).

주님께서는 유다 백성과 “피로 맺은 언약”(11절)을 상기 시키면서 그들을 구원하고 회복시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2-17절). 그 때가 되면 유다 백성은 “왕관에 박힌 보석같이 빛날 것”(16절)입니다. 

묵상:

우리 주님께서는 9절과 10절의 예언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유월절이 다가오면 유다 총독은 군마를 타고 거대한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성 서쪽 문을 통해 들어옵니다.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르는 소요 사태를 진압하기 위함입니다. 그 때 우리 주님은 정반대쪽 즉 예루살렘 성 동쪽 문을 통해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 오셨습니다(마 21:1-11). 그것은 9절과 10절에 나와 있는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통치자는 군사력으로 다스리려 합니다. 그래서 총독은 최대한 위압적인 모습을 연출하며 입성했습니다. 군마를 타고 입성한 것입니다. 반면, 구원자로 오시는 메시아는 사랑으로 다스리십니다. 세속적인 기준으로 보면 유다 총독의 힘이 더 강해 보이지만, 결국 세상을 변화시킨 것은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낮아지고 섬기고 희생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이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 손으로 악한 자들을 처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처분해 주실 것을 믿고 끝까지 사랑하고 섬기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나귀 새끼를 타고 십자가의 길을 따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불행하게도 이 복음이 요즈음 심하게 왜곡되고 있습니다. 강해지고 높아져서 군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깁니다. 자신의 손으로 악당을 처치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로 인해 이 세상에는 분열과 갈등과 투쟁과 테러가 더 심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용돌이에 기독교인들이 큰 몫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을 칩니다.  

2 thoughts on “스가랴서 9장: 새끼 나귀를 타신 이유

  1. Pax Roma 가 아니라 SHALOM 입니다. 세상에서 추구하는 평화는 평화가 아니라, 끝없는
    경쟁이며 언젠가는 패전 한다는것을 세상이 깨닫기를 원합니다.
    주님안에서 SHALOM 은 비록 약해보이나 결국은 승리 임을 확신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머지않아 이웃과 더불어 승전가 를 부르는 소망을 세상에 알리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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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지난해 봄에 “Stay at Home” 행정명령에 맞춰 50일 가까이 자발적으로 가게를 닫았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동네에 있는 다른 동종 가게들은 계속 장사를 했답니다. 두려움과 불안감으로 가게 문을 열고 있는 것보다 나라 (주정부)에서 하라는대로 집에 있으면서 추이를 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강남순 교수의 신문컬럼을 읽으면서 그의 시각에 동의도 하고 모르던 점을 깨닫게도 된 것이 시작이 되어 유튜브에서 그의 강의를 찾아 들어보았습니다. 일반인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해체주의 같은 단어는 낯 선 단어요 개념입니다. 공부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이 아니면 대부분 공부와는 끝입니다. 일과 관련한 자격증 취득을 위한 공부 외에 공부가 좋아서, 공부하고 싶어서 공부하는 공부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언론이나 시사지를 통해 정보를 얻는 정도에서 좀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지식을 찾거나, “자기계발” 차원에서 공부를 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은지 모르지만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공부는 이제 끝! 이라는 뜻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해체주의 같은 단어는 설교 시간에 부정적이고 반교회적인 사상으로 소개가 되어 그쪽으로는 아예 관심조차 갖지 않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생각해보면 이민자의 삶은 지극히 단순하여 가정과 일터 만을 오고가다 주일에 교회에 가서 말씀 (설교) 듣고 교인들과 교제하는 것이 전부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나”라는 사람은 일을 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아이들 공부 시키고, 노후에 -돈을 더 이상 벌 수 없을 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얼마라도 모아놓아야 한다는 것 외에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은 없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돈이 모든 것보다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돈이 없으면 살아지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니 공부를 한다, 책을 읽는다, 노래를 부른다…일체의 모든 일도 결국에는 “돈으로 사는 현실”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따지는 것이 이민자의 생활이기도 합니다. 이런 중에 코로나로 인해 집에 갇혀 있으면서 책을 읽고 강의를 듣는 사치는 참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강교수의 강연을 통해 포스트모던의 긍정적인 면도 비로소 보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본 종교 (기독교)에 관해 강의한 내용 중에 “교회는 Plan A가 아니다, 교회는 늘 Plan B여야 한다”는 말은 마음에 조약돌 한 개를 던진 것 같이 파장을 만드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뜻하기에 교회 외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다른 한 편으로 교회의 힘, 사회 권력으로서의 교회를 생각해 보면 숨 못 쉬는 사람, 변방으로 내몰린 사람, 피할 데가 없는 사람에게 대안 곧 Plan B가 되어 주었나를 묻게 됩니다. 코로나로 인해 교회가 essential business로 인정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지금껏 교회가 보여준 모습이 “갑”의 얼굴, “그들 만의” 세상을 꿈꿔 온 것은 아니었는지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미국 의사당에서 벌어진 수치스러운 일들도 우리가 최고다 그러니 우리 세상이어야 한다라고 외치는 교회의 모습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겸손한 미소를 지으시는데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우리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고개를 젓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 나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시고 주님의 빛으로 밝혀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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